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빌헬름 리터 폰 레프 (문단 편집) === 전쟁 범죄와의 연관 === 일각에서는 레프가 부하들의 학살을 막았으며 이 때문에 전후 그의 부하들은 단 한 명도 기소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는 옛 프로이센 군사 전통의 계승자인 국방군이 비무장 민간인을 대상으로 직접적인 학살을 저지르는 것에 대해서는 큰 불명예이자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생각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친위대와 국방군 보안사단들이 적극적으로 빨치산 토벌을 빙자한 학살을 벌이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가령 레프의 휘하에 있던 [[에리히 회프너]] 상급대장의 경우 '유대-볼셰비즘과 모스크바의 아시아 놈들'을 뿌리부터 분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인물이다. 그는 북부집단군 소속으로 제4전차군을 이끌 당시에 [[프란츠 발터 슈타흘레커]] 친위소장의 [[아인자츠그루펜]] A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고, 그의 협력에 힘입어 아인자츠그루펜 A는 발트 3국 지역 유대인들을 거의 전부 살해했다. 레프는 이 사실을 알았음에도 방임했다. 때문에 회프너의 경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았다면 전범 재판에서 목이 달아났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전쟁 도중에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가담했다가 처형된 바람에 전범재판장에서 죗값을 제대로 치르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볼프람 베테의 《독일국방군》에 따르면, 레프는 북부집단군 후방 지역(Rückwärtiges Heeresgebiet Nord)의 사령관으로서 후방 안정화와 인종 정화를 명목으로 수많은 민간인 학살을 수행했던 프란츠 폰 로케(Franz von Roques)[* 참고로 이 양반의 사촌인 카를 폰 로케 대장은 남부집단군 후방지역사령부 사령관이다. 그도 북쪽에 있던 자기 사촌처럼 우크라이나에서 온갖 전쟁범죄를 진두지휘했다. 다만 그는 천수를 누린 프란츠와는 달리 학살 죄목으로 수감중 1949년 사망했다.] 국방군 보병대장이 카우나스에서 벌어진 유대인 학살 소식을 알려 왔을 때, 부관에게 이에 대해 자신이 손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답했다. 여기서 말하는 후방사령부란, 독일 각 집단군들의 예하부대로서 각각 9개의 보안사단들 및 비밀야전경찰부대들을 가지고 선전 및 빨치산 토벌 등의 임무를 수행한 부대를 말한다. 이들은 빨치산 토벌을 명목으로 직접적인 섬멸전을 수행했으며, 친위대 경찰부대, 심지어는 악명 높은 [[아인자츠그루펜|친위대 특무대]]와도 협조하곤 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초토화 작전과 학살, 그리고 '부수적인 피해'가 벌어졌음은 물론이다. 이들 사령부들은 소속된 집단군 외에도 별도로 OKH([[육군최고사령부]])의 국방군 병참감인 포병대장 [[에두아르트 바그너]]에게 보고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바그너는 나중에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으로 처형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충실한 나치로, 병참 외에도 전선 후방의 안정화를 담당했던 인물이다. 그는 1941년 5월 친위대 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와 공모해 국방군과 [[아인자츠그루펜|친위대 특무대]]가 협조하도록 별도의 규칙까지 제정하면서 학살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북부집단군 후방지역 사령부 관할 지역에는 사령부 직속 보안사단들인 207, 281, 285사단, 국방군 비밀야전경찰 및 이들과 협력하는 상급 친위대 및 경찰지도자 [[한스-아돌프 프뤼츠만]] 친위중장의 친위특무대와 [[질서경찰]] 북부경찰연대 등의 부대들이 활동하며 유대인 학살과 빨치산 섬멸전을 수행했다. 1941년 9월에는 레프의 65세의 생일을 맞이하여 히틀러가 25만 [[마르크#s-1.2|라이히스마르크]]를 하사했는데, 이를 전달하러 찾아온 루돌프 슈문트 보병대장은 레프와 그의 참모진들에게 특무대 A 그룹의 절멸 전쟁은 당연한 것이며, 군대는 정치의 문제에 관심 갖지 말 것을 주문했다. 이 이후 친위특무대 A 그룹은 24만 9420명에 달하는 유대인을 학살했다고 상부에 보고했으며, 이 과정에서 북부집단군이 친위특무대의 활동에 '교과서적일 정도로' 협조적이었다고 평했다. 레프 또한 학살의 공모자였던 것이다. 하이드리히까지 개입된 이러한 별도의 지휘체계 때문에 레프가 '손쓸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말한 듯하지만, 어찌되었건 후방사령부들은 기본적으로는 속한 집단군사령부의 지휘를 받았기에, 레프는 북부집단군의 총사령관이자 국방군 원수로서 현장에서 벌어지는 범죄 행동들을 막을 수 있는 '''충분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이를 방조한 셈이다. 거기다 프뤼츠만 친위중장이 자신의 부대에 무선통신을 통해 보고하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려 영국군에서 통신 감청에 실패했고, 이로 인해 발트 지역 학살의 자세한 내막을 알기 힘들게 된 것도 학살의 책임 소재를 불분명하게 하는 데 일조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1941년 남부와 중부집단군 후방 지역에서 벌어진 학살 다수는 영국 정보부 [[GCHQ|블레츨리 파크]]의 감청에 걸려 진상이 밝혀졌다. 또한 레프는 ''불명예스러운'' 직접적인 학살에는 거리를 두되 그 대안으로써 굶겨 죽이는 방법을 시행할 것을 피력했다. 그가 지휘했던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의 소련 국민들의 지옥 같은 생활상도 다 그의 그러한 끔찍한 발상에서 나온 산물인 것이다. 1944년 7월의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직후에는 다른 많은 원수들처럼 보신을 위해 히틀러에게 충성서약을 하기도 했다.[clearfix]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